피습자가 개전자와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포용"이 아니라 "항복"이라고 부른다.
피습자가 개전자와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는 "포용"이 아니라 "항복"이라고 부른다.
첫째. 트럼프나 시진핑의 그것과 같은 파괴적 비전이, 그 파국의 결과와 무관하게 적어도 "구태를 답습하지 않는 21세기적 시도"라는 이유로 호평될 수 있다면, 시간을 100년 되돌려서 스탈리니즘이나 나치즘을 "19세기 구태와는 다른 20세기적 시도"로 호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당대의 그러한 호평이 정치사회에 얼마나 처참한 비극을 가져올 수 있는지 우리는 후시적으로 알고 있다.
첫째. 트럼프나 시진핑의 그것과 같은 파괴적 비전이, 그 파국의 결과와 무관하게 적어도 "구태를 답습하지 않는 21세기적 시도"라는 이유로 호평될 수 있다면, 시간을 100년 되돌려서 스탈리니즘이나 나치즘을 "19세기 구태와는 다른 20세기적 시도"로 호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당대의 그러한 호평이 정치사회에 얼마나 처참한 비극을 가져올 수 있는지 우리는 후시적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