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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스러운 계정/최신화 스포일러/Don't reupload and copy my post
작품의 메시지와 호루스의 목표가 어떻게 조화를 맞춰나갈지 궁금한데, 이 와중에 하네카테가 2-62에서 했던 말은 의미심장.

"부디 그 사정이 정변의 이유가 아니길 바랍니다."

세트가 인정욕구로 저질렀던 그 많은 학살이 하네카테의 눈에는 얼마나 하잘것없어 보이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x.com/EA_pareidoli...
November 25, 2025 at 4:07 PM
호루스가 사랑에 눈멀어 하네카테의 신뢰를 배반했을 때, 대가는 즉시 치뤄진다. 그는 직감을 잃고 어리석고 약해지며, 더 큰 신성(누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부분에선 이야기의 어떤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고, 솔직히 말해 나를 매우 혼란스럽게 한다.

직감은 절대적 도덕률을 제시하며 호루스에게 ‘그녀들’을 배반하지 말라고 한다.(2-50) '그녀들'은 이시스 신도들과, 세트에게 희생당한 영혼들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절대 공정할 수 없다. 호루스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무엇이 ‘옳을까’? 호루스는 ‘옳아야’할까?
November 25, 2025 at 4:07 PM
호루스는 이것들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자랐다. 이런 미덕이 여성 집단(이시스 신도)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 집단인 세트의 신도들—캐러밴을 들여다보면 작품이 의도한 대조는 선명하다.

fg의 말마따나 그들은 군대가 가져야 할 공동체 의식마저 없었고, 늙거나 병든 자는 배척했다. 어린아이를 팔았고 여성을 강간했고, 종국에는 그들의 신에 의해 모래에 파묻혀 죽었다. 세트는 저주들의 목소리를 오랫동안 경청했고, 그 답은 '나라는 신은 숭배할 가치가 없으니 스스로 숙청해라'였다.
November 25, 2025 at 4:07 PM
신의 잘못을 몇 번이고 용서하는 인간의 관용과 사랑은 노년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많은 질문을 불러온다. '인간다움'과 '신'중에 우월한 것은 어느 쪽인가? ‘용서’는 ‘증오’보다 얼마나 더 크고 강한가? ‘인간성’은 ‘신’을 초월할 수 있는가? 아니, 애시당초 인간에게는 신이 필요한가?
November 25, 2025 at 4:07 PM
여기서 강조해야만 하는 것이 하네카테의 존재. 수천 년을 살아온 세트마저 감화될 정도로 그녀의 신념은 강하고(맹목적이고) 온화했으며, 심지어 세트가 그 자비를 배반했음에도 그랬다. 여전히 인간답게 분노하고 슬퍼할 줄 알면서도, 하네카테는 다시 몇 번이고 세트를 받아들였다.
November 25, 2025 at 4:07 PM
1부에서 진술된 이시스는 스스로 신격을 낮추고 고통과 치욕 속을 떠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오로지 증오에만 사로잡혀 있었는가? 2-44는 그렇지 않았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가장 낮은 곳에서 비참하게 떠돌 때조차 그녀에게 손을 내민 존재들이 있었다. 작고 어린 여성들. 실질적 권력은 하나도 갖지 못한 ‘나약하고 비루한 짐 덩어리들, 머저리들’(2-44). 그녀들이 이시스의 사랑을 다시 일깨웠으며, ‘세상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November 25, 2025 at 4:07 PM
그런데 세트의 거절이라는 동일한 좌절 앞에서, 오시리스와 호루스의 행보를 가른 것은 무엇일까? 오시리스와 달리 호루스는 어떻게 자기성찰이 가능했을까?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아직 좌절이 충분하지 않아서? (농담임)(아마도)

이 차이는 작품 전체의 주제와도 관련된다고,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한다.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호루스를 뒤틀리게 만든 고통스러운 유년기..아이러니하게도 이 불행한 유년기로 인해 호루스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장 약한 자들의 고통과 희생을 눈앞에서 목격했기 때문에.
November 25, 2025 at 4:07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