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무, 모래시계 실존 인물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 사건'과 권력의 민낯 #꼬꼬무 #꼬리에꼬리를무는그날이야기 # #모래시계 # #정덕진
허구가 현실보다 더 강렬할 때가 있다. 1995년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가 그렇다. 평균 시청률 46%를 기록하며 수도권 거리를 텅 비게 만들었던 이 작품이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9월 4일 방송 예정인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는 바로 그 진짜 주인공 '슬롯머신 대부' 정덕진 사건의 이야기를 다룬다.
장도연, 장성규, 장현성 세 이야기꾼이 펼쳐놓은 1993년의 진실은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었다. 한때 '슬롯머신 대부'로 불렸던 정덕진이라는 인물의 부침은 90년대 한국사회의 축소판이었다. 고아 출신으로 청량리 전자오락실에서 시작해 호텔 5개와 슬롯머신 업소 9개를 운영하는 거물이 된 그의 이야기는 성공신화처럼 들렸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계 유착의 실상은 시대의 어둠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이야기꾼들은 각자 다른 관점에서 사건을 바라봤다. 장도연은 정덕진이라는 인물의 인간적 면모에 주목하며 그가 단지 악인으로만 치부될 수 없는 복잡한 존재임을 드러냈다. 방송에서 그는 "정덕진이라는 사람을 보면서 참 복잡한 감정이 든다"며 "시대가 만든 괴물인지, 아니면 개인의 욕망이 시대를 이용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여줬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그해 겨울, 모래시계의 전설
장성규는 당시 권력구조와 부패의 연결고리를 추적하며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시스템의 문제임을 강조했다. 그는 정덕진이 어떻게 정관계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직폭력배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이건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문제였다"는 그의 지적은 사건의 본질을 꿰뚫었다.
장현성은 드라마 모래시계와 실제 사건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며 픽션이 현실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에 대해 성찰했다.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박태수와 실제 정덕진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며 "드라마는 현실을 각색했지만, 어느새 각색된 현실이 진짜보다 더 진짜가 되어버렸다"고 분석했다. 이는 서사의 힘과 집단기억의 메커니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특히 정덕진이 조직폭력배 김태촌과 손잡고 사업을 확장한 과정이 구체적으로 조명되면서, 당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정덕진은 경영상태가 부실한 오락실을 사들인 후 프리미엄을 붙여 지분을 판매하고, 일부러 승률을 높여 손님을 끌어들인 후 초창기 자본주들을 축출하는 수법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조직폭력배들이 위협수단으로 동원되었고, 정관계 인사들은 인허가와 단속 면제를 위한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사정작업으로 박철언 의원, 엄삼탁 전 국가안전기획부 기조실장 등 10여 명이 줄줄이 구속된 이 사건은 6공화국 시대 권력의 실체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정덕진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수입액의 10%만 장부에 기재하는 수법으로 120억 원대의 종합소득세를 포탈했고, 1991년에는 260만 달러에 미국 LA 저택을 구입하며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키기도 했다.
방송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출연자들이 보인 복합적 감정이었다. 드라마를 통해 각인된 박태수라는 캐릭터와 실제 정덕진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며 느끼는 당황스러움, 그리고 허구가 현실을 덮어버린 것에 대한 씁쓸함이 교차했다. 한 출연자는 "드라마 속 박태수는 나름의 의리와 철학이 있는 인물로 그려졌지만, 실제 정덕진의 행적을 보면 훨씬 복잡하고 어두운 면이 많다"고 소회를 밝혔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그해 겨울, 모래시계의 전설
이런 감정의 동요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떻게 기억을 구성하고, 어떤 서사를 선택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연결된다.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는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세 인물의 엇갈린 운명으로 그려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삼청교육대, YH 사건 등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방송을 통해 드러난 것은 드라마의 한계였다. 모래시계는 박태수라는 캐릭터에게 어떤 이념적 동기와 시대적 배경을 부여했지만, 실제 정덕진은 그런 거대서사와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는 순전히 개인적 욕망과 이익을 위해 움직였고, 시대의 모순을 이용했을 뿐 그것에 대한 저항이나 성찰은 없었다.
프로그램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홍준표 전 대구시장과 관련된 에피소드였다. 이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홍준표는 훗날 정치인이 되면서 자신을 '모래시계의 실제 모델'이라고 홍보했다. 이에 대해 송지나 작가는 2017년 반박문을 통해 "홍준표는 제가 만났던 여러 검사 중 한 분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 논란은 창작과 현실, 그리고 정치적 이용 사이의 미묘한 경계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그해 겨울, 모래시계의 전설
이야기꾼들은 또한 정덕진의 말년에도 주목했다. 1994년 출소 후 미국 이민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그는 2001년 언론 인터뷰에서 "해방 후 최대의 물의를 일으켜 어딜 다녀도 떳떳하지 못했다"며 회한을 드러냈다. 2017년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그의 마지막은 화려했던 전성기와는 대조적으로 쓸쓸했다.
방송은 정덕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1990년대 초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줬다. 급속한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자란 부정부패의 구조, 돈과 권력이 만나는 지점에서 벌어진 갖가지 거래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시대적 맥락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다.
세 이야기꾼의 대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키워드는 '시대'였다. 정덕진이라는 개인의 선택과 행동이 과연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대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물이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계속해서 제기됐다.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었지만, 그 질문 자체가 이 프로그램이 던지는 핵심 메시지였다.
이야기꾼들이 마주한 가장 큰 질문은 바로 이것이었다. 우리는 왜 허구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가.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남긴 문화적 임팩트는 실제 사건보다 훨씬 크고 오래갔다. 정동진역이 관광명소가 되고, "나, 떨고 있냐"라는 대사가 20년 넘게 회자되는 동안, 정작 그 모델이 된 현실의 인물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그해 겨울, 모래시계의 전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의 기억 방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보다 아름답게 각색된 이야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모래시계가 보여준 박태수는 비록 조폭이지만 나름의 철학과 의리를 가진 인물이었다. 반면 실제 정덕진은 그런 로맨틱한 요소는 찾아보기 어려운, 철저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존재였다.
방송의 후반부에서 이야기꾼들은 이런 간극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허구와 현실의 차이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었다. 드라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정서와 욕망을 반영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차이를 인식하고, 허구 뒤에 숨겨진 현실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이라는 메시지였다.
꼬꼬무가 보여준 것은 역사와 기억, 그리고 서사의 힘에 대한 성찰이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실제 일어난 것 사이의 간극,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 때로는 진실이 아닌 더 매력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는 현실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실을 외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허구와 현실을 함께 들여다봄으로써 우리는 더 풍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그해 겨울, 모래시계의 전설
세 이야기꾼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 1993년의 진실은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권력과 돈이 만나는 지점에서 벌어지는 부패와 유착,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의 문제는 과연 과거의 일일까. 정덕진이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되돌아보게 된다.
방송이 마무리되면서 이야기꾼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은 '성찰'이었다. 과거를 단순히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선택과 그 결과를 통해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자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꼬꼠무라는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가치이자, 역사를 다루는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정덕진 사건'을 다룬 이 프로그램은 매주 목요일 밤 10시 20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를 통해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