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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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agan.bsky.social
성하상
@enagan.bsky.social
November 8, 2025 at 2:19 PM
October 31, 2025 at 7:32 PM
October 27, 2025 at 7:58 AM
October 27, 2025 at 7:52 AM
October 27, 2025 at 7:51 AM
October 13, 2025 at 11:40 PM
October 13, 2025 at 1:44 PM
October 12, 2025 at 5:10 AM
October 11, 2025 at 1:18 PM
October 11, 2025 at 1:17 PM
투르게네프
September 12, 2025 at 7:37 AM
September 11, 2025 at 10:20 PM
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September 7, 2025 at 7:35 AM
— Weep no more, woful shepherd, weep no more
For Lycidas, your sorrow, is not dead,
Sunk though he be beneath the watery floor...

— Through the dear might of Him that walked the waves,
Through the dear might...

John Milton, Lycidas - pastoral elegy on the death by drowning of Edward King
September 4, 2025 at 7:36 AM
“플로, 그 사람 일은 생각하지 마. 그러니까…… 그 일. 늘 있는 일이잖아. 사람들은 너무 약해. 못 견디고 포기하지. 하지만 세상은 굴러가고. 알지? 삶은 계속된다고. 전하고 똑같이. 그리고 몇 주가 지나면 새 체육 교사가 오겠지.” 그녀는 급하게 남편을, 느긋한 그의 모습을, 그가 대변한다고 믿는 모든 것을 향해 외쳤다. “아무것도 전하고 똑같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는 약하지 않았다고. 절대 아니지. 너무나 강해서 참을 수 없었던 거야. 그런데 우리가 돕지 않았지.”

토베 얀손, 체육 교사의 죽음 중
September 4, 2025 at 7:36 AM
September 4, 2025 at 7:33 AM
물론 우리는 청년 마르크스가 마르크스로 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보다 더 빠르게 살고자 하지 않으며, 마르크스를 대신해 살고자 하지 않고, 그를 위해 단절하거나 그를 위해 발견하고자 하지 않는다.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June 12, 2025 at 7:01 AM
할 포스터 실재의 귀환 중
June 9, 2025 at 5:30 PM
로마의 교외 변두리, 황무지 위에 다시 올려진 이 회화적 십자가형의 장면에서, [예수 옆의] 십자가에 묶인 강도 역할을 맡은 이 하층 프롤레타리아는, 결국엔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보다 더욱 모욕적으로, 더욱 순수하고 더욱 비극적으로, 끝내는 ‘정말로’ 죽게 될 것이다. “불쌍한 스트라치. 죽는 것 말고는, 그 또한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그에게는 없었구나”라고 오손 웰즈는 말하게 될 것이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민중들의 이미지)
June 8, 2025 at 8:29 AM
나는 의연하고 오랜 기쁨으로 삶의 모든 규칙을 파괴하는 장난꾸러기처럼 눈가에 주름을 잡고 웃었던 알프레디노와 루치아노의 얼굴과 함께, 산탄젤로 성 아래 테베레강의 다리 아래로 보이는 태양이 까맣게 태워버린 밤을 꼬박 새웠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June 8, 2025 at 8:26 AM
펠릭스(과타리)의 죽음에는 유한성, 한계를 넘어서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격분이 존재한다. (...) 나는 그가 우는 것을 보았다. 나도 때로는 운다. 나는 그가 내 어깨에 기대 “나는 그것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이 유한성, 이 부정적 결정성은 견뎌낼 수 없어”라고 말하며 우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실제로 그가 직면한 도전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갈가리 찢겨졌다. (안토니오 네그리)
June 6, 2025 at 9:42 AM
네그리
June 6, 2025 at 9:41 AM
- 당신 트럭은 어디에 두고?
- 모든 거죽의 길로 갔지. 영원한 건 없어.
June 1, 2025 at 5:28 AM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June 1, 2025 at 5:20 AM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에 나오는 네오프톨레무스는 스스로 고통으로 울부짖기 전까지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야망에 찬 자신의 계획과 진실을 말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고자 하는 자신 의지가 충돌하는 순간을 고통스럽게 겪으면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 결정에 책임을 지는 존재로 인정받는다.
June 1, 2025 at 5:18 AM